급진진보세력은 중도자유주의세력이 신자유주의로 경도되어가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를 견인하고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 투쟁해야/이를 통해 자신의 대중기반 강화해야 역사 歷史 History

포스트-민주화 시대, 진보의 대안을 묻는다

[한국 사회, 희망의 모색②-전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06.09.18 15:21 ㅣ최종 업데이트 06.10.23 17:43

오마이뉴스 (news)

'후대의 사가들은 지금 이 시기를 길고 긴 반동의 터널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기록할 것인가?' 지난 5.31 지방선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진보학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렇듯 진보민주진영 곳곳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진보민주진영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따갑게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넘쳐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은 여전한 데, 보수진영에서 던진 '개혁피로증'이라는 반론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민주주의와 진보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오마이뉴스>는 진보민주진영의 고민과 전망,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담론을 모으기 위해 심층 기획 글을 내보냅니다. 이 글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보내온 글의 전문입니다. <편집자주>

현재 민주진보세력은 새로운 도전의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을 가지고 이끌어왔던 민주진보세력에게 다양한 위기적 도전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보수세력에게 '잃어버린 10년'이 될 것처럼 보여졌던 민주정부 10년이 이제 보수세력에게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이를 나는 '전환적 위기'라고 규정한다. 여기서의 위기란 그람시가 이야기하는 바처럼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한 지적 혼란과 삶의 고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환적 위기 앞에 서서

물론 현재의 전환적 위기는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민주진보세력을 구성하는 다양한 세력에게 위기는 각각 다양한 형태로 현상화하고 있다. 정치적 세력에게 다르고 사회적 세력에게 다르다. 사회적 세력 내부에서도,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에게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단적으로 나는 민주화 혹은 민주개혁의 시기에서 포스트-민주화 시기로(최장집교수의 표현을 빌면 '민주화 이후' 시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도전성(挑戰性) 위기라고 본다. 이를 나는 '실패의 위기'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성공의 위기'로 본다.

사실 박정희체제도 자신의 독재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개발을 성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성취함으로써 개발이 동반하는 새로운 '성공의 위기'에 의해 직면하였고 그것을 적절히 응전하지 못함으로써 붕괴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제 민주세력은 자신들이 주창했던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성취되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역사란 참 아이러니한 것이다. 여기서 내가 민주주의의 '성공적' 실현에 따옴표를 붙이는 것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라는 견지에서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철저히 불완전하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에 대중들이 참여하면서 요구하였던 절차적 민주주의나 혹은 90년대 시민단체가 추동하였던 참여민주주의라는 기준에서 보면 아시아의 여러 민주화국가들에 비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진전되어 있다.

그렇다면 전환적 위기의 내용이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나는 위와 같은 상황 인식 위에서 전환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고투(苦鬪)지점들 중에서 두가지만을 다루고자 한다.

'개혁의제의 헤게모니적 실천'에 대한 고민

첫째,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가 통치세력이 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반독재민주진보세력이 '통치'세력으로 투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조건 변화에 상응하는 미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의 위기지점이 존재한다. 즉 개혁의제 실현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만이 존재하였지 개혁의제의 헤게모니적 실천에 대한 인식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헤게모니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하나의 집단이 타집단에 대해서 나아가 대중들에게 가지는 지적·인식적·도덕적·문화적 지도력을 의미한다.

나는 참여정부의 무능에 가까운 비(非)헤게모니적 성격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하는 점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러한 성격이 단순히 참여정부 구성원들이 비개혁적이어서 그렇다고 하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넘어, 민주진보세력 전체의 특정한 '인식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판단 위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반독재민주세력은 독재의 전기간에 걸쳐서 80년대 말~90년 초반까지의 시기에 통치에 저항하는 장외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1997년 김대중 정부의 수립으로 혹은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는 92년 김영삼 정부 수립에서부터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가 국가권력의 담당세력, 즉 통치세력이 된 것이다.

나는 국민정부나 참여정부 세력을 중도(개혁)자유주의 정치세력 혹은 중도리버럴(liberal)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경우 민주당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동안 사회적 세력으로 국가권력에 대결하면서 투쟁하던 세력에서 자신들이 통치세력이 되어 직접적으로 위로부터(자신들의 요구하는 의제를) 집행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현재의 전환적 위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이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제도권화’과정이다. 나는 통치엘리트가 된, 그러면서 과거의 반독재민주세력을 계승하는 제도권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의 문제점이 현재의 위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위기는 제도권화과정을 겪는 전교조라던가 민주노총이라던가 하는 민중운동조직들에게도 일정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환적 위기는 모든 사회운동조직에게도 나타난다. 나아가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적 정당도 내부의 정파적 균열의 비생산적인 영향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위기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보수세력에게는, 혹은 대중에게는 열린우리당을 포함하여 제도권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이 과거의 반독재 진보세력의 일정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위기는 일정 측면에서 '우리 모두'의 위기로 된다.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의 붕괴가 급진진보의 대중적 기반의 확대로 나타나면 문제가 없을 텐데, 대중의 눈에서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과 급진진보 세력 역시 동일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주도세력이고 동일한 진보적 세력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위기의 '전염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 문제가 있는가. 국가권력 담당세력으로서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이 이른바 개혁의제들을 설정하고 추진해야 한다는 당위성만을 인식하였지 그것을 '헤게모니적'으로 추진하는 데 대한 고민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개혁의제에 대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그것을 견지하느냐 하는 점만이 사고되었지 복합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지혜롭게 추진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고민이 부재하였다. 얼마나 개혁적이냐 하는 비판의 기준만이 존재하지, 그것을 통치엘리트로서 얼마나 헤게모니적으로 추진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비판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혁의제라고 하는 목표를 인지하고 추진하고자 하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우리는 필요조건에만 주목한 셈이다. 현재의 참여정부의 협소한 사회적 기반은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체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구체적 수준에서는 많은 경우 미숙함과 단순히 자신의 개혁적 입장을 천명하는 유치함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나의 표현으로 하면 '경계 지키기의 정치'에만 머물렀다. 참여정부 하에서 개혁의제에 대한 비판, 즉 보수세력의 정략적 쟁점화에 대하여 많은 경우 역(逆)쟁점화로 대응하는 식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이나 보수적 정치세력이 하나의 개혁의제에 대해 정략적 '쟁점화'를 시도한다고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역(逆)쟁점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엘리트로서 보다 원숙한 위치에서 '탈(脫)쟁점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쟁점화에 매몰됨으로써, 예컨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비판에 동수준에서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일개 신문과 동차원에 놓이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정략적 쟁점화를 하는 일개 신문(비록 그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고 하더라도)의 위상을 높여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저항의 미덕’과 '통치의 미덕'의 차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민주정부 하에서 진보의 외연이 확장되었는가... '경계 횡단의 정치'가 없었다

이 문제를 참여정부 하에서 민주세력 혹은 진보세력이 '외연'이 얼마나 확장되었는가하는 문제로 생각해보자. 박정희시대에 보수세력은 자신의 집권을 통해서 독재적 방식으로 외연을 확장했고 그 결과 지금도 친박정희세력이 다양한 사회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보수세력은 국가권력의 '잇점'을 통해서 자신의 외연을 확장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반독재민주세력 출신의 통치세력은 과연 얼마나 이런 점에서 '보수와 개혁진보의 경계'를 허물면서 보수를 획득했는가, 얼마나 보수의 분화를 촉진하면서 보수의 일부를 자신의 헤게모니 하에서 포섭할 수 있었는가.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가 국가권력 담당자가 되어 있는 이상, 독재 하에서 구축된 보수의 사회적 기반 혹은 조직적 기반을 어떻게 해체시켜 가면서, 현재의 중앙정치의 민주화 수준만큼 보수의 사회적 기반의 민주화를 성취할 것인가하는 것을 고민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개혁적·진보적 방식으로 '경계허물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독재 하에서 고착된, 독재 하에서 보수세력에 의해서 구성된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민주화의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허물지 못했다. 독재는 진보를 '빨갱이'와 동일시하면서 보수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다. 물론 그러한 방식의 폭력성과 작위성 때문에 결국 박정희정권은 붕괴했다.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들은 자기 방식대로, 때로는 타협과 포용을 통해서 전자를 획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바처럼, 오히려 반대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참여정부의 경우 많은 경우 '스타일의 급진성'만이 부각되었지 정작 실제적인 개혁의제의 관철과 그 과정에서의 보수의 사회적 기반의 균열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는 진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수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하는 과제를 바라보았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을 학문적인 표현으로 하면, '경계 지키기의 정치'에 머물렀을 뿐이지 '경계 횡단의 정치'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참여정부 하에서 '경계 지키기' 조차도 제대로 못했다는 '좌파적' 비판도 있을 수 있으며 혹은 자기 경계를 너무 확대하려고 했다는 '우파적' 비판도 존재할 것이다.

이 점은 중도자유주의 세력 뿐만 아니라, 급진민주세력도 직면하는 문제이다. 민주화의 맥락에서 급진진보세력이 과거 독재 하에서 누릴 수 없었던 '자유'와 '민주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조건'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는가하는 질문을 던져 보자. 돌이켜 보면 독재에 저항하면서, 보수적 주류집단에 대응하여 다양한 진보적 집단들이 형성·확대되어갔다.

그러나 정작 민주화가 되면서는 다양한 진보집단들이 스스로의 경계를 허물면서 보수의 분화를 촉진하고 보수집단의 일부를 포용하는 헤게모니적 실천의 노력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국면에서도 독재 시대의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행위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독재에 저항하기 위한 자기희생의 과정에서 '민중'이라던가 운동권이라고 하는 범주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과정에서 그러한 범주에 참여하지 못하는 중간지대의 사람이나 보수의 일부를 포괄하는 범주로 확장되어가지 못하였다. '경계 횡단의 정치'를 사고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많은 민주단체들이 보수와의 관계 속에서 10~15년 전과 동일한 구성원으로 고착되어 있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독재시대에 형성된 경계가 민주화과정에서 진보적으로 재편되지 못하고 고착되어 있는 것은, 사회운동 진영 내부에서의 '정파' 구조의 고착화에서도 볼 수 있다. 정파는 사실 독재라고 하는 엄혹한 조건 속에서, 분산적으로 존재하던 집단들이 더욱 높은 수준으로 소통하고 통합되어가는 계기였다. 그러나 정파를 뛰어넘는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이 요구되는 속에서, 예컨대 민주노동'당'과 같이 '당적 통합'과 '당적 소통'이 필요한데 오히려 정파가 이러한 당적 소통과 통합에 질곡으로 작동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많은 경우 진보는 경계 확인이나 경계 지키기의 차원에 머무르고 '경계 횡단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헤게모니적 실천을 고민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형태이지만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나 장외의 급진진보집단 모두가 이러한 '경계허물기'를 통해서 외연을 확대하고 헤게모니를 확장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동일한 인식태도(mentality)에서 연유한다고 하는 것이다.

급진진보 세력과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인식의 분리

이런 전제 위에서, 나는 거리에서 싸우는 급진진보세력과 통치세력이 된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이 명확히 분열·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미 분화되어 있다. 그러나 인식태도에서는 상당한 동일성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장외의 급진진보세력의 행위양식과 사고양식과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의 행위양식과 사고양식이 분화・분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의 '일체감'을 확인하기 보다는, 서로를 '대상화'하고 서로가 상이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달라져야 한다.

이러한 나의 이야기가 추상적으로 비칠 지도 모르겠다. 몇 가지 예를 들어서 나의 주장을 보다 분명히 해보고자 한다. 민중운동이나 시민운동은 장외에서 일정한 진보적 의제를 요구하고 투쟁한다. 통치엘리트는 스스로가 개혁적이고자 한다면 이러한 장외의 의제들에 수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개혁적 의제의 수용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진보적 의제가 얼마나 굴절되지 않고 수용되느냐가 전부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개혁적 의제(비록 굴절되더라도)가 어떻게 사회적인 보수세력의 저항 속에서 그리고 관료적 굴절의 조건속에서 헤게모니적으로 실현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장외의 민중운동이나 시민운동도 장내의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를 평가할 때 진보적 의제의 수용 여부로 판단한다.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도 그런 차원에만 시야가 한정됨으로써, 실제 일정한 개혁의제의 실현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많은 현실적 문제점들을 고려하면서 하나의 의제를 헤게모니적으로 구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 자체가 없다. 그래서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의 의제실행 과정에서의 많은 문제점은 부메랑이 되어 민주진보세력 전체의 공신력에도 타격을 가하는 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인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의 위기가 부메랑이 되어 모두의 위기로 되는 것이다.

의약분업의 예

다시 의약분업을 예로 들어 보자. 의약분업은 당초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가 주도적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의약분업은 분명 개혁적 의제이다. 그런데 이 개혁의제를 김대중 정부가 거의 전폭적으로 수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와 시민단체는 책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일체화되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의사의 기득권적 저항을 포함하여 의약분업의 실시과정에서 다양한 문제점들이 제기되었다. 그러한 사후적 문제점을 완화하기 위하여(예컨대 의사의 파업을 동반한 저항을 해결하기 위하여) 양보에 양보를 하는 과정에서 의약분업의 실제적인 모습은 대단히 굴절되었고 이 과정에서 의사집단 전체를 반(反)김대중 정부의 방향으로 보수화시키는 식으로 작동하였다.

물론 의사집단의 기득권적 이해를 나는 지금도 비판한다. 그러나 문제는 기득권적 이해로 구조화되어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나의 개혁의제를 실현할 것인가하는 점에 대해서 시민운동이나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 모두 고민의 지평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시민단체도 김대중 정부와 동일화될 필요가 없이 의제제기집단으로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좋았고 김대중 정부도 의약분업이라는 의제를 수용하면서도 통치엘리트로서 가능한 문제점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시민단체와는 다른 고려 위에서 의약분업을 추진하는 방식이 좋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민단체에서도 중도자유주의 정부의 과제를 단지 자신들이 요구하는 의제의 무조건적인 수용의 문제로 바라보고,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들도 시민단체의 사고와 구별되는 복합적인 현실적 고민을 갖는 식으로 자신을 정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엘리트가 부패하고 모든 정략적 고려 때문에 시민단체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것과는 다른 상태로 우리가 이동해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부패사건과 같이 너무도 명명백백한 문제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의 단순한 접근법과 복합적 접근법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들도 존재한다. 단순히 시민단체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단순접근법일 수 있는 문제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장과 국가의 민주화가 진전될 수록 바로 이러한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단순접근이 가져온 부메랑도 현재의 전환적 위기에 한 몫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민운동 입장에서도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가 시민운동의 요구대로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시민운동가들의 입장에서도, 통치엘리트가 시민운동가와 동일하게 사고하고 행위하는 것을 개혁의 유일한 잣대로 평가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한다.

의약분업이라는 목표를 시민운동이 제시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최소의 문제를 수반하면서 추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현실적 고민을 해야 한다. 이는 장외의 시민운동가가 아니라 통치엘리트가 고민해야 하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외의 사회운동은 '의제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고,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이를 지혜롭게 수행하는 것은 통치엘리트의 또다른 과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들은 무능과 부패, 비개혁성을 드러내는 점도 있으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점과 같은 복합적 현실에 대한 단순접근법과 유치함도 현재의 위기의 일부라는 것이다.

증세·감세 논쟁, FTA논쟁, 전시작전권 논란

최근의 증세・ 감세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한 것은, 증세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세금을 늘려서 복지를 제고하는 방향은 어떤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관철될 수밖에 없는 방향이다. 문제는 이것을 감세를 통하여 기업활동의 여건을 개선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강변하는 보수언론과 보수적 대중인식이 강력하게 존재하는 조건 속에서 어떻게 이를 실현할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이다. 당위적인 진보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거리의 진보세력의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을 국가정책화하여 사회적 저항과 언론 및 관료의 왜곡을 뚫고 실현해가는 것은 또다른 과제이다.

나아가 현안이 되어 있는 FTA의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FTA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투쟁하는데 동조하고 참여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의 경우는 FTA 반대투쟁의 투쟁을 지렛대로 하여 어떻게 미국과의 관계에서 혹은 국내 보수와의 관계 속에서, 개방의 파괴적 결과를 완충하는 방어장치를 갖는 '사회적 개방' 혹은 자본이해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미국의 이해를 최대한 견제하는 '방어적 개방'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FTA반대투쟁과 반대 국민들의 여론을 고려하여 FTA가 중단 내지는 좌절된다고 하면 예견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예컨대 '개방만이 살 길이다'라던가 '미국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산다'라는 식의 사고가 일부 국민들 사이에 만연한 조건에서 FTA좌절은 '반동적' 심리를 불러오고 그것은 민주진보세력 전체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고 보수의 약진을 가져올 수도 있다)을 어떻게 예방적으로 완화할 것인가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이런 식의 서로를 대상화하는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상이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분화된 고민이 필요하다.

동일한 문제가 최근의 전시작전권 통제문제에서도 나타난다. 전시작전권이라는 의제의 제시와 실현이라는 결과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차기 정권이 바뀌면 전시작전권 이양시기는 당장 조정이 될 수 있는 문제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전시작전권 환수가 중요하지, 2009년이나 2012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친미적 인식을 일부 국민들이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조건을 고려하면서 그것이 보수에 의해서 동원화되지 않도록 하면서 전시작전권 환수라는 목표를 탄력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나는 전시작전권에 대해서 전직장성들이 항의성명서를 내는데 대하여 현직 국방부 장관이 반박성명을 하고 논쟁하는 식으로 전개하는 방식이 과연 적절한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중간지대나 보수진영의 인사들을 논의 속에서 끌어들이면서 일정 부분까지 포괄하고 동의하는 타협적 안을 전시작전권 환수의 추진의 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여 추동하는 형국으로 해서 오히려 보수가 이를 국민적 쟁점으로 동원하는 것을 촉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중도자유주의 '통치' 엘리트는 오히려 원숙한 협의적 과정을 통해서 적대적인 영역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개혁의제가 아니라 개혁의제의 실현과정을 고민하는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의 또다른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현존하는 전작권이 환수되면 엄청난 안보위기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중들의 인식을 진보적으로 전환시키는 과제는 장외의 급진진보세력의 투쟁이다. 반대로 통치엘리트는 그것을 현존하는 현실로 고민하면서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한다.

단일변수적 접근과 다변수적 접근?

어떤 의미에서 거리의 진보투쟁세력은 '단일변수'적 접근을 하면서 의제지형을 확장해간다. 그러나 통치엘리트는 '다변수적' 접근 속에서 의제의 현실적 추진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 내부에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 대한 고민이 없다. 의제를 진전시켜가기만을 바라는 식으로, 통치엘리트들도 사고한다. 그리고 현실이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원래의 의제를 버리고 보수적 입장으로 급선회한다.

이런 점에서 반독재민주진보세력의 분열이 필요하다는 점, 나아가 사고의 분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반독재 민주세력의 일부가 통치엘리트가 되지 않았다면 거리에서 투쟁하면서 대중들의 태도를 바꾸는 일을 장기적 관점에서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주세력의 일부가 통치엘리트가 되는 정도로 발전하였다. 최소한 보수적 대중이 그렇게 인식하는 상태에 있다. 이제 그에 상응하는 분화와 분열이 필요하다. 국가통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과거 거리에서 투쟁하는 마인드를 갖는다면 어떤 면에서는 미덕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치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반독재 민주세력은 명확히 다른 세력으로 분리정립되어야 한다. 즉 통치세력으로서의 의제실현의 복합적인 문제점들을 고민하면서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와 의제지평을 확장하면서 한국사회의 진보화를 위해서 거리에서 투쟁하는 진보세력으로 분리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형식적으로는 분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동일한 인식태도가 존재하는 것을 본다. 예컨대 장외의 운동세력이 통치엘리트의 관점에서 고민을 한다던지 장내의 통치엘리트가 거리의 진보세력과 같은 인식태도로 사고한다던지 하는 것이다.

물론 참여정부 하에서 타협적이고 문제점을 내장하는 정책수행을 수없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통치엘리트로서는 비타협적인 개혁적 자세들도 많았다. 내가 저 자리에 있어도 견지하기 어려운 비타협적인 자세들도 있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 문제라던가 과거청산 같은 이슈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진보적 의제들을 수용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헤게모니적으로 실현할 것인가이다. 많은 경우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면장' 수준의 행위를 한다고 하는 데서 오는 공신력의 하락도 크다. 물론 면장으로 행위하는 것처럼 만드는 보수언론의 계급적 이해에 기초한 공격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서도 말이다.

부메랑을 막기 위하여

나는 반독재민주세력의 일부이었던 통치엘리트들의 문제가 부메랑이 되어 진보개혁세력 모두의 문제로 되는 현실을 보면서, 오히려 분화되고 분열되고 상이한 태도와 행위양식이 나타나야만이 '부정적인 부메랑' 효과가 최소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부정적인 부메랑 효과를 넘어, 보수의 새로운 활성화를 촉진하는 계기를 막아야 한다.

나는 이러한 분리정립의 사고가 장내와 장외의 민주진보세력 모두(각기 다른 형태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분리정립이 확연히 이루어져야, 오히려 장외의 민주진보세력은 더욱 장내 통치엘리트와 분리되는 방향으로 급진적으로 행위하고 사고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일체화된 사고가(특히 시민운동의 경우) 장외의 민주진보세력 내부의 급진성을 역으로 질곡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명확한 분리가 모두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신자유주의시대의 사회적 대안부재에서 오는 위기

둘째, 현재의 위기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는 포스트-민주화시대의 대안담론이 민주진보진영 내부에 부재하다고 하는 점이다. 나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은, 분리 정립 위에서, 다양한 대안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우리는 독재시대와 민주화시대를 거쳐 이른바 '포스트-민주화'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포스트-민주화라고 하는 것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87년 6월 민주항쟁에 내포되어 있던 민주주의적 과제들이 불철저하지만 실현됨으로써 나타나는 새로운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주어진 것으로 바라보면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결과에 고통받으면서 존재하고 있다. 단적으로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이나 급진진보세력들이 바로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대안을 대중들에게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미래지향적 세력이 아니라 과거지향적('과거청산' 같은 식에 머무르는) 세력으로 되어가고 있다. 80·90년대 민주주의 혹은 민주개혁은 더욱 인간답게 사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풍부한 상상력을 촉발하는 코드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주어진 것이 되었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가 오히려 비정규적 노동자 같은 존재에게는 더욱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 있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결합

주지하다시피 90년대 민주화 과정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결합되면서 진행되었고 민주화의 결과로 국가와 시장의 민주화와 투명성 제고가 촉진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영향의 결과로, 또한 그에 대응하는 효과적인 사회정책을 민주정부가 구사하지 못함으로써, 민주화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삶의 조건은 더욱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정책의 담지자가 되는 현실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강화된 것은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비정규화로 고통받고 있다. 교육을 둘러싸고는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제 교육불평등을 통해서 계급적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나아가 계급적 분리의 중요한 경제적 근거인 부동산 소유문제를 둘러싸고는 독재 정부 보다도 민주 정부 하에서 토지주택 불평등이 더욱 고착화되었고 세금정책을 통해서 이의 악화를 간신히 방지하는 수준에 놓여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맥락 속에서 전개되는 민주화가 역설적으로 투명성이나 민주성을 높였지만, 더욱 악화된 불평등과 경제적 고통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나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가 출현했다고 표현한다.

바로 이것이 민주개혁이 압도적인 시대적 과제가 되었던 민주화 시대와 달리 새로운 '포스트-민주화'의 조건이다. 문제는 이러한 포스트-민주화 시대에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이나 급진진보세력들이 대중들의 지향을 선도하는 미래지향적 대안과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상당 부분 비판적·진보적 지식인의 책임이고 우리들의 책임이다.

중도자유주의 프로젝트와 급진진보 프로젝트

여기서 우리 사회의 미래적 비젼을 둘러싸고 계급적으로 상층의 이해관계에 투철하게 선 시장근본주의적인 '신보수적 프로젝트'(예컨대 삼성의 '매력있는 한국')가 존재한다. 바로 이러한 보수적 프로젝트에 대응하는 민주진보적인 대안적인 프로젝트가 부재한다는 점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여기서 나는 첫째의 논점의 연장선 상에서, 통치엘리트로서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중도자유주의적의 프로젝트와 중장기적인 미래비젼을 담는 급진진보적 프로젝트는 분립정립되는 식으로 다양하게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도자유주의적 프로젝트는 보수세력과 구별되는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상쇄하는 프로젝트일 것이며, 급진진보세력은 우리 사회의 의식적 진보화를 촉진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자체를 쟁점화하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속에서 확대재생산되는 전지구적 자본질서를 구조적으로 재편하는 대안적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 단일한 진보는 없다. 다원적인 진보가 대중에게 제시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포스트-민주화시대의 대안은 불가불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결과에 대응하는 사회적 대책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급진진보의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의 완전한 철폐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대한 전지구적 전복 등의 근본적인 과제를 가지고 투쟁하고 있다. 실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어떻 형태로든 전지구적 기제를 갖지 않는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투쟁의 기조는 불가피하며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진보의 투쟁의 성과를 반영하면서(보수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지향과 그에 기반한 다양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파괴적 결과를 상쇄하는 '사회적인 리버럴' 정책을 구현해가야 한다.

강남 사람은 계급의식이 투철하고 강북사람은 계급의식이 없다?

서로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다. 나는 가끔 '강남 사람은 계급의식이 투철하고 강북사람은 계급의식이 없다'라고 말한다. 반공주의와 반북(反北)주의 속에서 대중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에 반하는 집단을 지지하는 방식으로(보수적 언론의 계급적 '선전'을 자신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장외의 급진진보세력의 과제의 하나는, 바로 강북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계급의식을 갖도록, 나아가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계급계층들이 정당한 계급의식을 갖도록 계몽하고 의식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도자유주의 통치세력들은 현존하는 계급의식의 지형 속에서 어떻게 개혁의제들을 관철할 것인가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민주세력이 성공한 것은 민주세력이 민주주의라는 의제, 민주개혁이라는 의제를 제기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희생들과 헌신 속에서 대중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외의 급진진보세력은 87년 6월 민주항쟁 속에 내재된 의제를 넘는 개혁의제를 대중적 의제로 만들기 위해 전진해야 한다.

그러나 통치엘리트는 보수적인 사회적 저항, 관료의 문제, 대외적 관계, 북한관계 등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하는 복합적 실천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상쇄하는 사회경제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가 단순히 현실적 추진방법만을 고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맥락에서, 보수와의 차별성을 자기변화를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현단계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초 중도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보수적 정치세력을 준별하였던 부패와 같은 정치적 개혁의제만을 가지고는 현단계에서 보수와 중도자유주의 세력의 차이는 크지 않다. 물론 현재도 차이가 있기는 하다.

정치적 개혁주의에서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

그러나 현재와 같은 정치적 개혁주의는 더 이상 중도자유주의 세력을 보수와 구별시켜주는 진보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의 '정치적 개혁주의'는 신자유주의에 응전하는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 전환해가야 한다.

참여정부 이후, 정당개혁·대연정·과거청산·사학법 등 정치적 이슈들에서 개혁성이 표출되었다. 그러나 사실 사회경제적 의제에서 개혁성이 표출된 것이 거의 없다. 비정규직 문제·교육·부동산·보건의료·재정조세 등이 사회경제적 핵심정책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8·31 부동산 정책처럼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에서 더 이상을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만이 추진되었을 뿐이다. 악화방지 정책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사회경제적 정책이 필요하다. 국민정부의 생산적 복지와 다른 참여적 복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를 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참여적 복지는 수사이거나 절차의 문제로 왜소화되어 있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시대의 '사회적 국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보수가 추동하는 친자본적인 경쟁력 지향적 국가에 대응하는 '사회적 완충국가' 모델로 가야 한다. 이것은 박정희시대와 현재의 보수세력이 추구하는 '취약한 시장과 자본을 지원하는' 국가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완충하는 사회적 국가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시대 새로운 사회적 국가 모델을 향하여

신자유주의시대의 새로운 사회적 국가모델의 개발은 중도자유주의세력과 급진진보 모두에게 과제로 주어진다. 전후의 일국적인 포디즘적 조건 위에서 사회복지국가가 정립되었다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조건 속에서 이는 해체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반세계화투쟁과 반신자유주의투쟁의 새로운 고양 속에서 신자유주의시대의 신개발국가모델이나 새로운 경쟁력 지향적 국가 모델을 뛰어넘어 새로운 공적 기능이 강화된 사회적 국가모델이 모색되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박정희시대로부터 국가가 시장·수출·기업·산업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해서 작동해야 한다고 하는 '친자본적' 국가인식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박정희시대를 통하여 강화된 경제적 기득권층과 자본가층은 국가의 사회성을 견제하고 지속적으로 친자본적 국가로 기능하도록 하는 구조적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물결은 이러한 국가의 탈(脫)사회화의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압도적인 흐름은 대안의 지형 자체를 크게 제약하는 셈이다.

이러한 악조건을 역류하면서 신자유주의시대의 사회적 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입장이 필요하다. 중도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도, 또한 급진진보세력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양자는 다른 내용을 담지할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앞에서 지적한대로, 단순히 중도자유주의 통치엘리트에게는 현단계 국가운영의 과제가 현실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보수적 저항들을 뚫고 헤게모니적으로 실현할 것인가하는 방법론적 고민이 추가되어야 한다.

물론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동하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사회적 국가를 향한 노력을 중도자유주의정치세력에게 요구하는 것 자체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급진진보세력은 중도자유주의세력이 신자유주의로 경도되어가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를 견인하고 중도자유주의세력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강화해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조희연 교수의 홈페이지는 http://dnsm.skhu.ac.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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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냉소주의와 진보 패배주의
한국 미래, 수구세력에게 맡길 것인가

[한국 사회, 희망의 모색①] 다시 희망의 순례를 시작하자

06.09.12 08:51 ㅣ최종 업데이트 06.10.23 17:54

정대화 (seoul)

'후대의 사가들은 지금 이 시기를 길고 긴 반동의 터널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기록할 것인가?' 지난 5.31 지방선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진보학자가 던진 질문입니다. 이렇듯 진보민주진영 곳곳에서 허탈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진보민주진영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따갑게 느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넘쳐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은 여전한 데, 보수진영에서 던진 '개혁피로증'이라는 반론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민주주의와 진보의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오마이뉴스>는 진보민주진영의 고민과 전망, 새로운 사회의 대안에 대한 담론을 모으기 위해 심층 기획 글을 내보냅니다. <편집자주>

▲ 문민정부는 군사정권과 야합한 3당합당에서 시작되었다. 김영삼은 90년 3당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문민정부를 자임했다. 사진은 지난 2003년 2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 김대중은 구군부의 김종필과 연합했으며 참여정부는 현대 재벌가의 정몽준과 연합하여 집권하였다. 사진은 지난 2003년 4월 22일 청와대에서 만난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 청와대 제공


1. 새로움은 창조의 원천

역성혁명의 경로를 방벌과 선위로 규정한 맹자는 하나라 걸왕을 폐하고 은나라를 건국한 탕왕을 방벌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했다. 걸왕을 축출한 탕왕은 신하들 앞에서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관한 자신의 구상과 결심을 밝혔다.

탕왕의 고사는 맹자의 진심장편에 "어느날 새로워진다면, 이를 통해서 나날이 새로워지고, 그리하여 더욱더 새로워질 것이다"라는 말로 정리되어 있다. 탕왕은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하여 아침마다 얼굴을 씻는 세숫대야에 아홉 자를 새겨 매일 매일 다짐하고 실천했다(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고대 중국역사에서 은나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반면, 한국현대사는 타율적 해방과 강대국의 개입이라는 검은 먹구름 속에서 우울하게 출발했다.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 적대적인 남북대립과 군사독재, 이로 인한 온갖 악폐는 우울한 출발의 결과였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솟아나는 법. 우리는 가난과 독재의 절망 속에서도 4월혁명, 부마항쟁, 서울의 봄, 광주항쟁, 6월항쟁이라는 고난과 모색의 행군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다.

2. 민주화의 환상에 묻힌 절망의 그림자

그리하여 6월항쟁 이후 90년대와 2000년대의 약 20년은 민주화의 장미빛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우리는 좁은 시야로 역사의 일면만을 보았다는 자과감에 빠져들었다. 자괴감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70~80년대의 민주화 담론으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확신했지만 90년대 이후의 현실은 우리의 확신에 파열구를 냈다. 민주화로 포장된 현실정치는 반복적으로 국민들을 기만했으며 민주화는 군사독재에서 재벌독재로 변질되었다.

민주화의 상징처럼 간주되었던 역대 민간정부가 도덕성을 상실하고 개혁에 실패한 무능한 정부로 비판받는 사이에 재벌은 6월항쟁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으며, 권력도 없고 군인도 없는 탈권위의 한국에서 재벌공화국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재벌공화국의 등장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균형추를 기울여 민주주의를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이 사회적 불평등을 가속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증유의 IMF사태에도 불구하고 삼성과 현대와 LG의 깃발은 세계속에 휘날리고 있으며, 그 바탕 위에서 한국경제는 세계 10위권을 넘보고 있다.

그 결과 현실민주주의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담론은 동력을 상실했고 개혁의 지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개혁피로증후군이 압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추진한 세력은 무능한 실패자로 낙인찍히면서 수구보수세력이 민주세력을 대체하는 자리바꿈이 일어나고 있다.

이 과정은 현대정치사에서 해방정국의 분단으로의 좌절, 4월혁명의 5·16군사쿠데타로의 좌절, 서울의 봄의 5·17군사쿠데타로의 좌절, 6월항쟁의 노태우 집권으로의 좌절에 버금가는 새로운 좌절의 징후로서, 6월항쟁의 생명력의 퇴조에 따른 역사적 반동화를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민간정부와 민주세력의 책임

민간정부는 이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군사정권 이후 최초의 민간정부인 문민정부는 군사정권과 야합한 3당합당에서 시작되었다. 김영삼은 90년 3당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문민정부를 자임했다.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 김대중은 구군부의 김종필과 연합했으며 참여정부는 현대 재벌가의 정몽준과 연합하여 집권하였다. 결국, 모든 민간정부가 군사정권 혹은 재벌에 의존하여 탄생한 셈이다.

개혁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라는 점 때문에 역대 민간정부는 출범 시점에서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과정의 문제점은 국정운영에서 드러났고, 예외없이 정책방향의 혼선과 개혁의 좌절로 나타났다. 개혁대상인 수구보수세력과 결탁하여 개혁을 추진한 정권의 모순성이 드러난 것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잘못된 수단을 선택한 결과 잘못된 수단이 목적 실현 자체를 방해한 것이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말기에 나타난 권력의 난맥상이나 문민정부가 자초한 IMF사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참여정부에서 나타난 대통령 탄핵 이후의 취약한 국정운영은 민간정부의 정당성은 물론 민주화의 정당성까지 훼손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역대 민간정부는 국정운영 과정에서 국민들의 요구를 철저하게 외면함으로써 지지도 하락을 자초하고 정부와 국민의 관계를 단절시켜버렸다.

민주세력 또한 이 상황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민주세력은 민간정부를 구성한 기성정치세력과의 관계 설정에서 오류를 범했다. 6월항쟁 이후 민주세력의 상층부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독자적 전망을 포기하고 기성정치세력이 주도하는 현실정치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참여했다.

민주세력이 독자적 전망을 포기하고 지역주의적인 보수정치구조에 수동적으로 편입된 결과는 매우 혹독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는 양김 이후의 중장기적 발전 전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민주세력이 양김정치의 지역주의와 부패정치에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정부의 실패와 양김에 대한 국민적 비판을 민주세력이 감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민주세력에 대한 비판과 저평가의 원인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물론, 정치적 참여파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정치적 참여를 선택하지 않은 민주세력은 노동운동, 시민운동, 지역운동으로 분화 발전했다. 그러나 이들이 '초대받은 정치'와 구별되는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제시한 것은 아니며, 정치 이외의 영역에서 사회적 대안세력으로 굳건하게 뿌리내린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노동운동의 조합주의적 성격이나 시민운동과 지역운동의 한계는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중장기적 발전 전망을 상실한 사회운동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이다.

4. "빛이 없는 어둠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희망

▲ 8일 좋은정책포럼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민주정부의 위기와 진보 개혁 세력의 진로'에 관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최근의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는 이러한 현실을 자양분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민주화는 퇴색되었고 진보의 방향은 실종되었다는 자포자기가 어렵지 않게 거론되는 상황이다. 수구정권의 등장이 불가피한 현실이라는 자조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희망의 구호가 제기되고 있지만, 이것은 '장독을 깨뜨리고 모기를 잡는' 희망일 뿐이다.

민간정부에 실망하고, 민간정부에 참여한 민주세력에게 실망하고, 운동세력의 고답적인 논리에 실망한 상태에서 10년만의 권토중래를 노리는 수구세력의 반복되는 나팔소리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진보는커녕 민주화와 개혁조차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민주세력 자체가 새로운 전망을 제시할 집단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근거는 존재한다. 그것은 역설적 근거이다. 역사발전을 내적동인과 외적요인의 합작품이라고 할 때 희망 역시 여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정치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결여한 무능한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판단, 부패한 수구세력에게 권력을 맡길 수 없다는 판단, 천민적 재벌공화국이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는 판단이 희망의 출발점이다.

무능한 정치를 유능한 정치로 바꾸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신념,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부패한 수구세력을 제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 재벌공화국을 대체할 새로운 민주사회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신념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념을 실천할 사회적 역량을 조직할 수 있고, 이를 통해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 희망이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두 가지 수정이 필요하다. 가장 근본적인 수정은 권력과 정치권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는 것이다. 국정운영은 정부가 전담하고 정치는 정당이 전담한다는 편협한 정치인식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민사회가 권력과 정치의 원천이라는 인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또 하나의 수정은 시민의식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시민들이 보수화되었다는 인식, 개혁을 기피한다는 인식,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식은 원인과 결과를 균형적으로 분석하지 못한 인과론적 오류의 산물이다. 시민의식의 변화가 원인이 아니라 잘못된 정치가 원인이며 시민의식은 그 결과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5. 희망의 공론화 필요

그렇다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 대체로 다음 네 가지의 사회적 조건을 배경으로 희망의 순례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구조화된 사회적 양극화와 한미FTA 등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모순구조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적 양극화와 한미FTA는 과거 독재에 항거했던 민주연합을 승계하는 새로운 사회연합의 형성을 예고하는 조건으로서, 이 전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사회적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 지역의 등장과 풀뿌리운동의 활성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도시화와 중앙집중화로 인한 지역의 소외와 빈곤에서 지역의 재발견이 시작되었다. 풀뿌리운동은 90년대의 시민운동을 사회적으로 확산할 차세대 운동으로 성장하고 있다. 중앙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지역의 등장과 시민운동에 대한 풀뿌리운동의 활성화가 새로운 거점이 될 것이다.

셋째, 6월항쟁 이후 확장된 시민사회와 그 주역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역들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이들은 지역주의와 반공주의에 의존하는 수구세력의 부패함과 무능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정부의 한계를 극복할 의지와 정책을 가지고 있다.

넷째, 기성정치세력의 구조적 한계가 희망의 토양이 되고 있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참담한 실패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시사하는 예고편이다. 또한 참여정부가 '마지막 민간정부'이기를 갈망하면서도 대안의 제시없이 민간정부의 실패에 의존하는 무능하고 부패한 수구세력에게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비관하는 민주적 비관주의와 수구세력의 집권을 용인하는 정치적 패배주의를 넘어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운동적 관점에서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시작하는 것이며, 이와 더불어 희망의 근거를 사회적 담론투쟁을 통해 공론화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한 사회적 연대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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